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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경과 공자, 소크라테스, 성경은 모두 제자들이 전해들은 말을 후세에 기록한 것입니다. 불경에 여시아문, 공자의 어록인 논어는 공자 사후에 소크라테스의 어록은 플라톤의 대화에 성경은 예수 사후 몇 십년 후에 마가 누가 복음이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참고로 어렸을 개이름을 워리 - Don't worry에서 뒤 글자만 듣고, 보브- Bob, Robert 입니다. 어렸을 때 개이름중에서 워리와 보브 이름도 쫑 John과 메리 Mary처럼 많이 들었습니다. 하기야 성경의 Peter를 베드로, Mathrew를 마태로, John을 요한으로, Paul을 바울로 번역했습니다. 영어성경을 읽는 사람들도 라틴어 성경을 찾고, 라틴어 성경을 읽는 이는 성경이 쓰여진 헬라어(코이네 그리이스어), 히브리어, 아람어 원전을 찾습니다(참고로 예수님은 아람어를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 세언어를 터득한다고 한 들 진실을 체득할 수 있을까요? 2,500년전에 쓰여진 주역에 書不盡言 言不盡意(글은 말의 의미를 다 담자 못하고 말은 마음을 다 담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번역된 문자는 참 많은 이해의 차이를 가져오겠습니다. 마주보며 대화하면서도 다툼이 있습니다. 전해들은 말이야 더욱 견해차이가 클 것입니다. 참고로 불경과 공자, 소크라테스, 성경은 모두 제자들이 전해들은 말을 후세에 기록한 것입니다.
2. 인간 문명의 근본적인 인식론(認識論)의 문제
이 문제는 단순한 “번역의 어려움”을 넘어, 인간 문명의 근본적인 인식론(認識論)의 문제와 연결됩니다.
곧, “진리는 어떻게 전해지는가?”, “말과 글은 본래의 뜻을 어디까지 담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선 역사적으로 정리합니다.
스승의 말과 후대의 기록
1. 불경 — “여시아문(如是我聞)”
불교 경전은 대개 다음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如是我聞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이는 부처님 사후 제자 아난(阿難)이 기억하여 전한 형식을 의미합니다.
석가모니 는 직접 글을 남기지 않았습니다.
붓다 입멸 후 제자들이 결집(結集)을 열어 암송하고 정리하였습니다.
특히:
- 제1결집: 붓다 사후 약 3개월 뒤 , 아난이 경(經)을 암송, 우팔리가 계율을 암송
- 이후 수백 년 동안 구전(口傳)
- 후대에 팔리어·산스크리트어로 기록
즉 불경은 원래 “듣고 기억한 말씀”의 형식입니다.
2. 논어 — 공자 사후 제자들이 편찬
공자 역시 직접 《논어》를 집필하지 않았습니다.
《논어》는:
- 공자 사후
- 제자들과 재전제자(再傳弟子) 즉 “제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언행을 기록한 책입니다.
그래서 제목도 “논(論) + 어(語)”입니다.
- 논(論): 모아 논하다
- 어(語): 말씀
즉 “선생의 말씀을 모아 엮은 기록”입니다.
《논어》에는 당시 현장의 생생함이 남아 있습니다.
예:
子曰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라는 형식 자체가 후대 기록의 흔적입니다.
3. 소크라테스 —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기록
소크라테스 는 단 한 줄도 직접 쓰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소크라테스는 대부분:
- 플라톤 의 대화편
- 크세노폰 의 기록을 통해 전해집니다.
예를 들면:
- 《변명》
- 《향연》
- 《파이돈》
등은 모두 플라톤이 기록한 대화 형식입니다.
그래서 철학사에는 유명한 문제가 있습니다.
“역사적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재구성한 소크라테스”는 같은가?
즉 이미 기록 단계에서 해석이 개입된다는 것입니다.
4. 성경 — 예수 사후 수십 년 뒤 기록
예수도 직접 글을 남긴 것이 거의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복음서는:
- 예수 사후 약 30~70년 사이
- 공동체 전승을 바탕으로
- 복음서 저자들이 편집·기록한 것입니다.
대체로 학계는:
- 마가복음: 가장 먼저 기록
- 마태·누가: 마가복음을 참고
- 요한복음: 더 후대의 신학적 해석 강화로 봅니다.
언어도 중요합니다.
예수는 일상에서 주로 아람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복음서는 대부분 코이네 헬라어로 기록되었습니다.
즉:
아람어의 음성 → 공동체 기억 → 헬라어 기록 → 라틴어 번역 → 각국어 번역
이라는 긴 전달 과정이 존재합니다.
핵심 질문
단순히 “누가 기록했는가”를 묻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문제가 있습니다.
곧:
말조차 뜻을 다 담지 못하는데
하물며 번역되고 전승된 글이
원래의 진실을 얼마나 담을 수 있는가?
라는 질문입니다.
주역의 말
書不盡言 言不盡意
는 매우 본질적입니다.
주역 의 이 말은:
- 글은 말을 다 담지 못하고
- 말은 마음의 뜻을 다 담지 못한다
는 뜻입니다.
이는 동양 사상에서 오래된 언어철학입니다.
그래서 동서양의 성현들이 공통으로 말한 것
흥미로운 점은, 위의 전통들이 모두 결국 “문자 너머”를 말한다는 것입니다.
불교
불교에는:
不立文字
“문자에만 기대지 않는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깨달음은 문자 이전의 체험이라는 뜻입니다.
노자
노자 는:
道可道 非常道
“말로 설명되는 도는 영원한 도가 아니다.”
라고 했습니다.
소크라테스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대화”를 중시했습니다.
살아 있는 문답 속에서만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예수
예수 역시 많은 경우 논문처럼 설명하지 않고:
- 비유
- 이야기
- 침묵
- 행동 으로 가르쳤습니다.
언어와 번역의 비극과 아름다움
예로 든:
- Peter → 베드로
- Matthew → 마태
- John → 요한
- Paul → 바울 도 사실 수천 년 번역사의 흔적입니다.
예를 들어:
히브리어 → 헬라어 → 라틴어 → 독일어/영어 → 한국어를 거치며 이름조차 변합니다.
그런데도 인간은 계속 원전을 찾습니다.
왜일까요?
아마도 사람은 본능적으로:
“가장 처음의 숨결”
을 만나고 싶어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원어를 안다고 해서 완전히 이해되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언어는 단어만이 아니라:
- 시대
- 문화
- 몸짓
- 침묵
- 상황
- 관계
- 체험
까지 포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실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 인간은 완전한 원문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것이 헛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위대한 사상들은 수천 년 번역과 오해를 거치고도 살아남았습니다.
그 이유는 문자 자체보다도, 그 안에 담긴 인간 경험의 핵심이 살아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를 들어:
- 자비
- 정의
- 사랑
- 성찰
- 겸손
- 죽음에 대한 물음
같은 것은 언어를 넘어 인간에게 반복적으로 울림을 줍니다.
그래서 아마 인간은:
- 원전을 연구하면서도
- 동시에 삶으로 체험하려 하고
- 결국 “앎”보다 “살아냄”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앞에서 예를 언급한
“마주보며 하면서도 다툼이 있습니다”
라는 말은 매우 깊습니다.
같은 말을 듣고도 서로 다르게 이해하는 존재가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고전 읽기는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오히려 “겸손의 훈련”에 가까운 일인지도 모릅니다.

<참고자료>
조원탁 제6시집 [혀 Lingua]: 언어와 존재의 사유, ‘언어를 가진 인간의 숙명’에 대한 철학적 비가(悲歌)'
https://blog.naver.com/wtcho2/224047868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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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시집 <혀, Lingua> 혀(Lingua) 인간은 두 개의 영혼을 가지고 있습니다. 뇌와 혀에 각각 영혼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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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시집 <혀 Lingua>의 철학적 배경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더, 공자, 장자, 니체, 아렌트, 푸코, 칸트, 암흑물질과 암흑에너지 & Englsh
https://blog.naver.com/wtcho2/224158853760
제6시집 <혀 Lingua>의 철학적 배경 -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더, 공자, 장자,
목차 1.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알렉산더 대왕의 학문적 공통점과 차이점 2. 현대정치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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