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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의 사회적 통제기전에 대한 견해
1. 예술과 자유 - 예술 특히 음악은 자유로운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음악활동이 자유로운 것처럼 보이지요. 앞서 쇼펜하우어처럼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지향한다라는 말처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화(淨化,Cartharsis)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2. 예술과 사회계층적 규범 그런데 크게는 예술활동은 계층적 사회적 규범 속에 통제되어 있습니다. 물론 트롯을 하든 클래식을 하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그 활동은 사회적 규범과 그 음악을 선호하는 계층의 기호와 선호 속에서 놀고 있다는 뜻이지요. 자기가 선호하는 음악이 모든 계층에 적용될 수 있다고 착각하거나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비난하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사회에 대한 과학적 성찰의 결여에서 비롯된 오류입니다 3. 예술의 통제적 기능 흔히 현대사회를 통제하는 기구중에 3S를 이야기합니다. 3S는 Screen Sex Sports입니다. 수많은 영상 드라마, 이와 연관된 각종 성 문화 산업, 프로야구 등 스포츠 산업 등은 사회에서 정치나 지배기구에 관심을 약하게 하는 도구들이라는 뜻이지요. 그런다고 해서 영화나 드라마, 유튜브를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적 묘사가 있는 다양한 매체나 산업들, 스포츠들을 경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기능이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향유하는 것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4. 음악의 사회통제성 - 동양 음악은 사회를 통제하는 중요한 도구중의 하나입니다. 앞서 이성원 교수의 저서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동양에서 음악은 대표적인 사회적 통제수단이었습니다. 공자가 음악을 좋아했다고 하는데 그 대상이 일반 모든 음악이 아닙니다. 사회를 안정시키는 지배계층이 즐기는 음악입니다. 공자는 매우 빈한한 계층에서 태어나 결국 사회지배계층으로 신분이 상승되었습니다. 공자가 말하는 시, 예, 음악은 모두 2,500년전 사회지배계층이 선호하는 도구들이었습니다. 세종대왕이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 음악 또한 정교하고 고요한 정악으로서 예와 법도를 중요시하는 음악이었습니다. 사회질서를 유지하는데 활용하는 매개수단이었습니다. 종교음악은 성스런 종교적 신념을 강화시키는 방편입니다 - 서양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현재 대중적 지지나 후원이 없다고 해서 그가 하고 있는 음악이 의미없는 것이 아닙니다. 음악의 유행과 힛트를 치는 배경에는 음악적 역량과 함께 사회적 기반의 지지가 필요합니다. 바하, 헨델, 하이든, 모차르트의 성공배경에는 왕족이나 귀족의 방대한 재정적 후원이 있었습니다.흔히 클래식 음악은 작곡하고 연주하는데 필요한 인력, 장소 등이 필요합니다. 결국 후원자들의 취향, 사회적 이해를 대변하는 음악이 나올 수 밖에 없습니다. 바그너의 많은 음악들은 독일 히틀러 시대의 영웅적 행적을 미화하는 데 이용되었고 많은 지원을 받았습니다. 안익태가 일제시대때 당시 일본의 괴뢰국가였던 만주국의 후원을 받으며 '만주 환상곡' 등의 음악들을 작곡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해방이후 스페인으로 가서 살게 된 정황이기도 합니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가곡 중심의 소박한 음악들이었기에 웅장한 음악을 원하는 당시 지배계층의 적극적 후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슈베르트는 지인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며 살았습니다. 생전에 자신이 작곡할 곡을 두드릴 피아노도 없었고 자신의 음악집 하나 내지 못하고 30대 초에 쓸쓸히 삶을 마감하였습니다. 하물며 역대 3대 교향곡의 하나로 포함되는 미완성 교향곡도 그가 죽은 지 37년 후에야 비로소 처음 연주되었을 정도였습니다. 5. 한국의 음악사에서의 변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가곡으로 인정되는 명태(양명문 작사, 변훈 작곡)도 1952년 처음 발표되었을 때 '저것도 음악이냐'고 연주장에서 야유가 쏟아졌습니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와 같은 애상적이고 비탄적인 곡들이 당시 가곡의 흐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야말로 느닷없이 선이 굵고 씩씩한 멜로디와 노래하는 중에 크 하며 술 마시는 소리, 껄껄껄 웃는 소리가 섞인 이 노래가 대중은 물론 전문가들의 눈에도 괴퍅하게 보였습니다. 크게 낙심한 작곡자는 음악계를 떠났습니다. 그런데 10여년 후 다시 발표회장에서 연주된 명태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졌습니다. 한국 가곡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곡이라고 환호를 받았습니다. 그 시대에 대중에게 많이 노출되는 음악은 지배계층의 후원이나 사회집단의 취향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 취향도 변화됩니다. 바하(Bach)나 베토벤(Bethoven)의 음악을 좋아하는 것이 교양의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그 외 음악은 미흡하다고 하는 사람이야말로 고상한 체 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좋아하는 음악은 계층별 다양한 기호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지 음악 자체의 질로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트롯을 좋아하는 정서도 있고 바하를 좋아하는 기질도 있습니다. 6. 음악의 사회성과 윤리성 중요한 것은 음악은 음악 자체의 음으로만 좋고 나쁨을 구분할 수 없습니다. 음악만 좋으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음에는 역사가 있고 사회성과 윤리성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의 언행을 보면 그 사람의 성격과 기질을 알 수 있습니다. 음악의 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김시습이 글을 써서 과거에서 급제를 하였습니다. 글이 명문이었습니다. 나중에 김시습이 알게 된 사실은 자기 글에서 언급하며 비판한 사실이 자기 직계할아버지를 공격한 내용이었습니다. 이에 김시습이 크게 절망하여 방랑시인이 되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글, 아름다운 음악이라고 그 역사와 의미를 모르고 찬송하는 것은 얇은 얼음이 언 겨울호수를 건너는 것과 같이 두려운 일입니다. 7. 우리 나주필하모니는 어떤 음악과 음악활동을 하는가? : 느슨한 연대 좋아하는 음악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중이나 남의 평가보다는 자신에게 충실한 음악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슈베르트(Schubert)나 명태 음악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세계적인 수준의 음악들도 당대에 저평가와 악평을 받았는데 소박한 아마추어 음악을 하면서 높은 수준의 평판과 업적을 기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그것을 기대할 필요도 없습니다. "자신의 귀를 향하여 노래부르라"고 한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의 말은 자신의 삶과 생활과 자신이 하고 있는 예술행위 그 자체를 사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의미이겠습니다. 나주 필하모니에 모인 사람들은 잘난 것도 못난 것도 아닙니다. 음악을 하는 사람의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물이 아래로 고이듯이 모인 것입니다. 그래서 같이 음악을 향해 나가는 사람은 상호존중해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취향이 달라서 다른 웅덩이에 모인 것입니다. 누가 틀리고 잘난 것이 아니고 서로 다소 다른 음악성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은 지향점이 다르지만 서로 변화가 되어 다시 모일 수도 있고, 모였던 분도 헤어질 수도 있습니다. 다른 곳에서 다른 그룹에서 음악을 하는 사람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서로의 길을 존중하고 격려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느슨한 연대라고 합니다. 서로 존경하면서 서로의 활동을 존중합니다. 완벽한 연주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부족한 것도 연주의 일부로 간주합니다. 비판보다는 격려를, 완성보다는 과정을, 음악 자체가 주는 즐거움과 위로와 함께 고상하고 품격있는 인간관계를 추구합니다. 모이고 헤치고 하는 것에 대해서 크게 비중을 두지 않습니다. 음악 이외의 인간관계에 중점을 두는 사람은 음악과 관계없이 그 갈등으로 음악활동을 그만두기도 합니다. 반갑게 맞이하고 즐겁게 활동하고 기꺼이 보내주고 하는 가운데 음악에 대한 진전과 지역사회와 사회공동체의 예술활동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 부록: 조직활동의 적: 뒷담화를 전하는 사람 신뢰와 음악에 대한 사랑은 모든 것을 이겨냅니다. 예외가 있습니다. 뒷담화를 전하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불화와 갈등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비교하기를 일삼고, 남이 전하는 뒷담화에 의심하고 상처받고 원망하고 우울해하면 풍토가 생기면 그 조직에 희망이 없습니다. 부모와 형제도 없는 곳에서는 원망하고 비난합니다. 그 원망과 비난을 전하는 사람은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으려고 작정한 사람입니다. 사람관계에 압정을 뿌리는 사람입니다. 저는 뒤에서 비난하는 사람은 탓하지 않습니다. 그 뒷담화를 전하는 사람이 있으면 저는 그 사람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나한테는 그 사람이 말한 나에 대한 뒷담화를 전하지만 그 사람에 가서는 내가 말한 뒷담화를 전하겠지 속으로 생각합니다. 웃으면서 들어줍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멀리 합니다. 속마음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모든 사람과 친하려고 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습니다. 공자도 말이 많은 사람. 간사한 사람, 표정이 다른 사람은 아주 멀리하라고 하였습니다. 공자같은 성인도 2,500년전 뒷담화를 전하는 사람때문에 고통이 모질게 컸던 모양입니다. 모든 사람은 뒤에서나 앞에서나 남을 평가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남이 한 말을 쉽게 남에게 전하는 사람은 경계할 사람입니다. 가장 훌륭한 사람: 뒷담화를 듣고도 허허 웃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여성 인물중에 국회의원이 된 분이 한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에 대한 일화입니다. 다른 사람 한분이 그 그 여성을 많이 공격하였습니다. 보면 팔을 부러뜨려놓겠다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누가 전하자 그 말을 들은 이 여성이 그 분을 직접 찾아가서 " 어이 홍의원 내 팔 여기 있소" 하면서 팔을 내밀었습니다. 그러자 홍의원이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다가 이내 내막을 이해하고 껄껄 웃으며 "누님 내가 농담으로 그랬소" 그러면서 둘이 껄껄 웃으며 화해했다고 합니다. 뒷담화는 있을 수 밖에 없고 듣고도 여유와 아량으로 껄껄 웃을 수 있는 마음. 음악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중요한 도량입니다. 이러한 굳건한 여유와 도량 위에 음악활동도 가능한 것이겠죠. 희망은 없다 네 동생을 봐라. 제발 동생의 반만큼만 해라. 옆집을 봐요. 제발 그 집의 반만큼만 해요. 비교를 이기는 희망은 없다. 왜 그 사람들은 나를 뒤에서 비난할까 왜 그 사람들은 나를 칭찬하지 않을까 의심을 이기는 희망은 없다. 왜 우리 부모는 가난했을까 왜 선생님은 나를 미워했을까 원망을 이기는 희망은 없다, 왜 우리는 죽어야만 할까 왜 우리는 아플 수 밖에 없나 우울을 이기는 희망은 없다. (2024. 12. 29 06: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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