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주읍성 4대문
1. 남고문 (南顧門)
나주읍성의 정문 역할을 하던 문으로, 4대문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화려합니다.
의미: '임금이 계신 북쪽(한양)을 돌아본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특징: 2층 구조의 누각(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으며, 과거 나주를 방문하는 관리나 사신들이 통과해야 했던 관문이었습니다. 1920년대에 철거되었다가 1993년에 가장 먼저 복원되었습니다.

2. 동점문 (東漸門)
나주읍성의 동문으로, 나주천이 흐르는 길목에 위치해 있습니다.
의미: '덕화(德化)가 동쪽으로 젖어든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성군(聖君)의 다스림이 백성에게 고루 퍼지기를 바라는 유교적 이상을 담은 명칭입니다.
특징: 2006년에 복원되었으며, 주변에 나주천과 연결된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어 경관이 아름답습니다.


3. 서성문 (西城門)
나주읍성의 서문으로, '영금문(映錦門)'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립니다.
역사적 의미: 구한말 동학농민운동 당시 농민군과 관군이 치열하게 격돌했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특징: 2011년에 복원되었으며, 성벽의 기초석 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어 읍성의 옛 구조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됩니다.

4. 북망문 (北望門)
나주읍성의 북문으로, 4대문 중 가장 마지막으로 복원되었습니다.
의미: '북쪽의 임금을 바라본다'는 충절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특징: 2018년에 복원되면서 나주읍성 4대문이 마침내 모두 제 모습을 찾게 되었습니다. 북망문 복원을 통해 약 3.7km에 달하는 나주읍성 둘레길의 상징적인 연결고리가 완성되었습니다.


그림 조원탁
1) 나주 남쪽에서 오는 사람들은 남문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동문을 통하여 남평이나 장성방향으로 갔다. 지금 다리가 있는 나주대교나 영상포대교는 모두 포구였을 가능성이 크다.
2) 북문쪽에는 지금 대호저수지가 있는데 당시 습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통행하는데 불편하였을 것이다.
3) 나주향교는 교육기관인데 성밖에 있다. 나주향교는 고려시대때 절이었다고 한다(이영기 선생님의 답사에 의하면 주춧돌이 절의 주춧돌이라는 유적이 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절을 허물고 향교를 지었다. 절은 대체로 왕실이나 호족들이 지었으니 그 근거지를 허무는 것이었다.
4) 지금의 나주초등학교 일대는 조선시대 군사시설과 관련된 공간일 가능성 높다. 그러나 특정 군영 이름이 딱 대응되는 확정 사료는 제한적이다. 대신 나주읍성 내부 군사공간의 일부였다는 해석이 가장 설득력 있다. 나주읍성은 그 자체가 행정군사복합체였을 것이다.
한양을 가는데 왜 북망문이 아니라 동점문을 사용하였는가
, 단순 거리 문제가 아니라
“길의 방향과 교통망” 문제입니다.
① 북망문 = ‘북쪽’이지만 서울 직통이 아님
북망문(北望門)은 이름 그대로
→ “북쪽을 바라보는 문”이지
→ “서울로 바로 이어지는 길”은 아닙니다.
조선시대 교통 특징
- 직선 이동 X
- 큰 길(대로) 중심 이동 O
② 동점문 = 서울 가는 ‘간선도로 연결문’
동점문을 통해 나가면
영산강 동쪽 길 → 광주 → 한양으로 이어지는 주요 간선로와 연결됩니다.
즉
- 동점문 = “국도급 길과 연결”
- 북망문 = “지방 소로(小路) 성격 가능성”
③ 실제 이동은 ‘거리’보다 ‘길의 질’
조선시대 여행 기준
|
기준
|
중요도
|
|
거리
|
낮음
|
|
길 상태
|
매우 중요
|
|
역참(숙소)
|
매우 중요
|
|
치안
|
매우 중요
|
그래서 선택은 이렇게 됩니다
- 북망문 → 더 가까울 수 있음 ❌ (길이 나쁨)
- 동점문 → 조금 돌아감 ⭕ (큰길, 안전, 빠름)
④ 강과 지형 영향 (핵심 포인트)
나주는 영산강 도시입니다.
- 북쪽: 강, 습지, 우회 필요
- 동쪽: 교통로 발달 (광주 방향)
결국 동쪽이 훨씬 “이동 친화적 축”
⑤ ‘북망’의 의미도 힌트
북망문(北望門)은 단순 교통문이라기보다 상징성이 강한 문입니다
- 북망 = 서울(임금)을 바라봄
- 의례적·상징적 성격
즉 “실제 교통 중심문은 아닐 가능성”
1. 조선시대 나주 → 한양 실제 이동 경로
당시 이동은 “직선 최단거리”가 아니라
👉 역참(驛站)과 간선도로(대로)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 기본 경로 흐름
👉 나주 → 광주 → 전주 → 공주 → 천안 → 수원 → 한양
이 흐름은 조선의 대표 간선인 호남대로 → 삼남대로로 이어집니다.
■ 출발:
- 남쪽에서 온 사람
- 👉 남고문 → 동점문으로 빠져나감
이유
→ 동쪽으로 나가야 ‘큰길’과 연결되기 때문
■ 1단계: 나주 →
- 영산강 동쪽 축 이동
- 당시 광주는 교통 결절점
👉 여기서 이미 “서울행 공식 루트”에 진입
■ 2단계: 광주 →
- 호남대로 핵심 구간
- 관군·관리·상인 모두 이용
■ 3단계: 전주 →
- 충청도로 진입
- 금강 유역 따라 이동
■ 4단계: 공주 → →
- 삼남대로 구간
- 역참 밀집 → 숙박·말 교체 용이
■ 최종 도착:
핵심 특징 요약
- 직선 이동 ❌
- “역참 네트워크 + 대로 중심” 이동 ⭕
오늘날로 치면 “지름길 대신 고속도로 선택”
예상 소요 시간
- 보통 보행: 약 10~15일
- 말 이용: 약 5~7일
2. 나주읍성 4대문 기능과 역할
나주읍성은 단순 출입문이 아니라
방향별 ‘기능 분담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 ① 남고문 (南固門)
👉 남쪽 교통 관문
- 해남·강진·영암 등 남부 지역 연결
- 농산물·해산물 유입
특징
→ “지역 생활 물류 중심문”
■ ② 동점문 (東漸門)
가장 중요한 ‘대외 교통문’
- 광주 → 한양으로 이어지는 간선 연결
- 관리·사신·상인 주요 통로
핵심 역할
→ “서울 가는 공식 출구”
→ 그래서 남쪽 사람도 동점문으로 우회
③ 서성문 (西成門)
👉 영산강 및 서해 방향
- 나루터, 수운 연결
- 곡물·세곡 이동
특징
→ “수운 + 경제 기능 중심”
■ ④ 북망문 (北望門)
👉 가장 흥미로운 문입니다
- 이름 의미: “북쪽(서울)을 바라봄”
- 실제 기능: 상징성 + 보조 통로
왜 북망문은 잘 안 썼나?
① 길의 문제
- 북쪽 = 영산강·습지
- 우회 필요 → 오히려 비효율
② 간선도로 미연결
- 큰 길이 동쪽(광주)에 집중
- 북쪽은 ‘지방 소로’ 가능성 큼
③ 상징성 중심 문
- 북망 = 임금이 있는 방향
- 의례적 의미 강함
실제 교통문은 아님
4대문 기능 한눈에 정리
|
문
|
방향
|
역할
|
|
남고문
|
남쪽
|
지역 물류
|
|
동점문
|
동쪽
|
서울행 핵심 통로
|
|
서성문
|
서쪽
|
수운·경제
|
|
북망문
|
북쪽
|
상징 + 보조
|
왜 북망문이 아니라 동점문인가?
답: 길이 아니라 ‘길망(路網)’ 때문이다
- 북망문 = 방향은 맞지만 길이 나쁨
- 동점문 = 돌아가지만 국가 간선 연결
결국 “가까운 길보다 빠른 길”을 선택한 것
나주읍성 vs 광주읍성 규모 비교
■ 기본 수치 비교
|
구분
|
나주읍성
|
광주읍성
|
|
둘레
|
약 3.7km
|
약 2.5km
|
|
면적
|
약 97만㎡
|
(명확 수치 없으나 나주보다 작음)
|
|
위상
|
전라도 중심 목사고을
|
전라도 4대 읍성 중 하나
|
핵심 결론
→ 나주읍성이 확실히 더 큽니다.
- 나주읍성: 전라도 행정 중심(목사 관아) → 규모 큼
- 광주읍성: 군사·행정 겸용 중형급
실제 기록에서도
- 광주읍성 둘레 약 2.5km
- 나주읍성 둘레 약 3.7km
체감으로 보면
→ 나주읍성은 “소형 도성급”
→ 광주읍성은 “중형 읍성”
2. 일제강점기 철거 시기
두 읍성 모두 공통적으로 1910년대 초~1920년대 초에 집중 철거됩니다.
■ 나주읍성
- 1910년대: 성문 철거, 성벽 훼손 시작
■ 광주읍성
- 일제 초기 도시 개조 과정에서 철거
- 도로 개설 및 일본인 거주지 조성 목적
👉 공통 이유
- 성곽 = 전통 권력 상징 → 식민지 통치에 불편
- 도시 근대화(도로·상업지) 명분으로 철거
👉 한마디로
→ “성벽을 허물고 도로를 낸 것”

'정원풍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 4월의 정원(4.18)- 모란 작약 무등산 금성산 : 나주 노안 (1) | 2026.04.18 |
|---|---|
| 이별재(이별하는 고개) (0) | 2026.04.18 |
| 회복기의 노래 - 박군서 매혹 (0) | 2026.04.17 |
| 거미줄 - 박군서 매혹 (0) | 2026.04.16 |
| 산박하와 나비 - 박군서의 매혹 (0) | 2026.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