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9. 존경하는 선배 세사람 - 2부 두고두고 생각나는 사람

ART GARDEN 2026. 6. 23. 10:01

<2부 두고두고 생각나는 사람>

9. 내 안에 남아있는 존경하는 선배 세 사람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함께 일했던 사람들의 이름은 점차 희미해지지만, 어떤 사람은 수십 년이 지나도 문득문득 떠오른다. 그들의 말과 행동은 어느새 내 삶의 기준이 되고, 일하는 태도의 뿌리가 된다.

내게는 지금도 두고두고 생각나는 직장 선배 세 사람이 있다.

1) 결정적인 순간에 책임을 지는 사람

졸업하고 처음 직장에 입사했을 때였다.

첫 출근 날, 과장은 두툼한 원고 뭉치를 내게 건네주었다. 나는 원고를 받아 들고 질문했다.

"이 일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지금 생각하면 신입사원답지 않은 당돌한 질문이었다. 과장은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말했다.

"책을 만들려고 한다. 출간할 수 있도록 원고를 정리해 보게."

다음 날부터 주말이었다. 집에서 쉬면서 A4 용지로 약 500쪽에 달하는 원고를 모두 읽었다. 용어를 통일하고, 목차를 정리하고, 전체적인 체계를 다시 살폈다. 원고는 이미 잘 작성되어 있었고, 약간의 손질만 거치면 곧바로 출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월요일 아침, 정리한 내용을 보고하자 과장은 보고내용을 훑어본 뒤 말했다.

"좋네. 이대로 출간을 추진하게."

돌이켜 보면 나는 일을 맡으면 반드시 목적과 목표를 먼저 확인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목적 없이 일하는 것은 목적지 없이 길을 떠나는 여행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분을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 일은 따로 있었다.

업무를 진행하던 중 내가 중요한 실수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찾아가 사실대로 보고했다.

과장은 아무 말 없이 전화를 걸고, 관련 부서를 찾아다니며 문제를 수습했다. 이틀 정도 지나자 일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나를 꾸짖지 않았다.

사흘째 되는 날, 내가 먼저 찾아가 물었다.

"과장님, 제가 큰 실수를 했는데 왜 꾸중하지 않으십니까? 필요한 징계가 있다면 달게 받겠습니다."

과장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것은 자네 책임이 아니라 과장인 내 책임이야. 내가 직원들에게 일일이 지시하고 챙기는 이유는 결국 그 일이 내 일이기 때문이네. 일이 잘못되었을 때 바로잡는 것 또한 내 책임이지."

그리고 덧붙였다.

"일은 잘 마무리되었으니 앞으로는 실수 없이 하면 되네."

나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세월이 흘러 내가 선배가 되고 후배들을 이끌게 되었을 때, 이 과장의 말은 내 일하는 신조가 되었다. 지시는 메모를 써 주듯 명확하게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최종 책임은 내가 진다는 원칙 말이다.

2) 철저한 사람

두 번째 선배는 철두철미함의 대명사였다.

부하 직원들이 보고서를 가져오면 옆에 앉혀 두고 자신의 연필로 자료를 처음부터 다시 정리했다. 하나하나 묻고, 확인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문을 구하고, 고치고, 다시 정리했다. 며칠이 걸려도 상관하지 않았다.

실수가 있을 수 없었다.

어느 해 중요한 국정감사 보고자료를 준비할 때였다. 며칠 동안 밤늦게까지 자료를 작성했다. 그런데 보고 전날 갑자기 맹장염이 찾아왔다.

보통 사람 같으면 병원으로 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예정된 보고를 직접 마친 뒤에야 병원으로 향했다. 이미 맹장염은 복막염으로 진행되어 있었고, 상당 기간 입원해야 했다.

주위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다음 해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국정감사 자료를 준비하느라 모두 이틀 동안 집에도 가지 못한 채 사무실에 머물렀다. 물론 그 자신도 함께였다.

셋째 날 새벽, 그가 잠깐 집에 다녀오겠다며 나갔다. 우리도 새벽 다섯 시쯤 목욕탕에 가서 몸을 씻고 돌아왔다.

아침 일곱 시.

그는 이미 출근해 있었다.

우리를 모두 불러 세우더니 말했다.

"사흘 동안 집에도 안 갔다고 위세를 부리는 것이냐?"

그리고 한 시간 가까이 꾸중했다.

엄격하고 호랑이 같았지만 누구도 억울해하지 않았다. 본인이 가장 먼저 실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일을 대하는 태도에서 타협이 없었다. 완벽한 준비와 솔선수범이 무엇인지를 몸으로 보여 준 사람이었다.

3) 후배들을 창의적으로 방목하는 지휘자

세 번째 선배는 사람을 키우는 데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어느 날 내가 작성한 문서를 들고 이사장 결재를 받고 돌아왔을 때였다.

그가 허벅지를 긁적거리며 말했다.

"이사장님이 오타를 하나 고쳐 주시더라."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그는 나무라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내용이지 오탈자가 본질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물론 오탈자가 없어야 하는 것은 기본이다. 그러나 실수 하나 때문에 사람의 열정과 아이디어를 꺾지 않는 여유가 그에게는 있었다.

그는 기억력도 비상했다.

지시한 자료를 찾지 못해 서랍과 책장을 뒤지며 식은땀을 흘리고 있으면, 뒤에 와 서 있다가 아무 말 없이 자료 하나를 쑥 꺼내 들었다.

오랫동안 찾아도 보이지 않던 자료를 그는 단번에 찾아냈다.

그리고 못 찾는다고 책망도 하지 않았다.

찾은 자료를 가지고 얼른 일에 몰두하였다.

그는 조직을 위해 위험을 감수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의자에 앉아 한참 생각하다가 나를 불렀다.

"이 자료를 가지고 국회의원 누구를 만나고 오게."

그는 사람을 폭넓게 알고 있었고, 정책 결정 과정에 필요한 사람들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다.

조직을 움직이는 힘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자발적인 복종을 이끌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헤어진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이 세 사람은 지금도 내 안에 살아 있다.

책임지는 법, 철저하게 준비하는 법, 사람을 믿고 성장시키는 법.

나는 지금도 일을 할 때 이들의 모습을 떠올린다.

내가 먼저 열심히 한다.

지시는 명확하게 한다.

문제가 생기면 책임지고 처리한다.

그리고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는 관계의 힘을 소중히 여긴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일은 후배들을 창의적으로 성장시키는 일이다. 창의성을 키우려면 먼저 리더가 더 큰 목표와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것 없이 방임만 하면 조직은 금세 혼란에 빠진다.

창의성과 꼼꼼함을 함께 키우는 일, 그리고 업무가 끝난 뒤에도 식사와 대화를 통해 인간적인 신뢰를 쌓아 가는 일.

 

아직도 이 세 사람의 장점을 다 배우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광풍제월, 염재 선생님 글씨

호탕하고 단정한 성품을 이르는 말이다.

광풍제월(光風霽月)

  • 霽(갤 제) :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개다

직역하면 "맑게 개인 뒤의 밝은 바람과 깨끗한 달",

비가 그친 뒤의 청명한 자연 풍경을 뜻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아름다운 풍경을 가리키는 데 그치지 않고,

  •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사심이 없는 인품
  • 도량이 넓고 고결한 정신
  • 투명하고 담백한 성품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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