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고를 마치며 – 삶은 기억이 아니라 해석이다
10대때 장 폴 사르트르(Jean-Paul Sartre, 1905-1980)의 '말들(Les Mots, The Words, 1964년 발간)'을 읽은 적이 있다. 사르트르는 이 저서에서 성장기의 읽기(lire, reading)와 쓰기(écrire, writing)가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형성했는지를 성찰한다. 읽기(lire)는 다른 사람의 세계를 받아들이는 행위였고, 쓰기(écrire)는 자신만의 세계를 창조하여 존재를 증명하는 행위였다. 이 저서로 노벨문학상에 선정되었지만 사르트르는 고사하였다. 일생에 상을 받기를 원치않았던 지성인 사르트르다운 결정이었다.
사르트르는 어린 시절을 회상했지만, 단순히 과거를 기록하지 않았다. 기억을 성찰로 바꾸었고, 경험을 사유로 승화시켰다. 그의 회고록은 한 개인의 자서전이면서도 한 시대의 정신을 담은 철학이 되었다. '던져진 존재'로서 결단하고 책임지는 사르트르 실존주의 철학의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다.
'던져진 존재'라는 표현은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세상에 태어나 존재하게 되었다는 실존주의의 핵심 사상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이 개념을 체계적으로 제시한 사람은 Martin Heidegger(하이데거)인데, 사르트르는 이를 자신의 실존철학 속에서 더욱 발전시켰다. 던져진 존재란 무엇인가? 우리는 언제 태어날지, 어디에서 태어날지, 부모가 누구인지, 어떤 시대를 살게 될지를 선택하지 못한다. 예를 들어,대한민국에 태어난 것, 남성인지 여성인지, 부유한 가정인지 가난한 가정인지, 건강한 몸인지 장애를 가진 몸인지 이러한 조건들은 모두 자신의 선택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조건을 '던져짐'이라고 한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이러한 조건 속에 던져져 있지만, 그 조건에 의해 완전히 결정되는 존재는 아니라고 보았다. 그의 유명한 명제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L'existence précède l'essence."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년기를 거쳐 학교생활과 군대와 사회생활을 거쳐 노년이 이르는 삶의 과정에서 나는 나의 갈 길을 알지 못하였다. 나의 의지대로 결정된 일은 거의 없었다. 우연 속에서 선택하고 살다보니 어느덧 나이가 들었다. 주어진 현재의 대안 중에서 그 하나를 선택하고 그 선택 속에 내 자신을 형성하여왔다. 그 선택의 결과가 잘되었거나 못되었거나 그것은 나의 책임이다. 그 때 그렇게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그 길을 가지 않았더라면 하는 마음이 있지만 돌이킬 수 없다. 내 자신이 책임을 지지 않고 남 탓할 여지가 없다. 그 책임은 온전히 나에게 있다. 조건은 있었지만 최종 선택은 내가 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간은 선택하지 않을 자유도 없다.'
던져진 운명 속에 선택의 과정을 간단히 정리하다보니 15편이 되었다. 기억을 펼치면 수백명의 사람, 수백개의 사건들을 기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 삶의 날이 저물어가고 있다. 그래도 삶은 흘러가면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기록하면 하나의 의미가 형성된다. 기억은 시간이 남긴 흔적이지만, 기록은 그 흔적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이다.
크게 3부로 나누어 유년기, 사회생활, 은퇴후 음악예술활동으로 정리하였다. 1부에서는 유년기의 기억을 통해 오늘의 나를 만든 힘들을 살펴보았다. 부모님에 대한 추억, 마을 사람들의 정겨움, 들은 다양한 언어들, 어린 시절의 실수와 깨달음은 지금도 내 삶의 밑바탕이 되고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어도 결국 어린 시절의 언어와 정서, 그리고 사랑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던져진 존재로서 선택의 여지없이 운명을 수용하는 단계였다.
2부에서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사람들을 떠올렸다. 좋은 스승과 선배, 그리고 따뜻하면서 강력한 리더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는 힘이 있다. 우리는 큰 업적보다도 누군가에게 베풀었던 작은 배려와 진심으로 더 오래 기억되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학교와 군대 그리고 사회생활은 나의 선택과 던져진 운명의 혼합물이었다.
3부에서는 은퇴 이후의 삶을 기록했다. 음악은 단순한 취미가 아니라 또 하나의 언어가 되었고, 예술은 경쟁이 아니라 서로를 연결하는 다리가 되었다. 또한 왜 기록하는지, 어떤 음악을 추구해야 하는지,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이기도하였다.
노년의 삶은 진정한 인간의 삶을 누릴 수 있다. 나이가 들었으니 누가 지시할 사람도 없다. 내 자유 속에 선택하고 책임을 진다. 자유와 선택과 책임이 함께 하는 삶이다.
그러고 보면 노년의 삶이야말로 일생중 진정한 인간의 삶이다. 자유롭게 선택하고 그 결과를 책임지는 삶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초인(超人, Übermensch) 개념을 이야기하였다. 번역을 거창하게 해서 그렇지 초인은 단순히 힘이 세거나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맹목적으로 운명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삶의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창조하며 살아가는 인간이다. 위인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독재자나 사람들이 많이 따르는 종교지도자를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공자가 말하는 '군자' 또는 장자가 말하는 '진인' 또는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자'일 수도 있다.
비틀즈의 「언덕 위의 바보, The Fool on the Hill」이라는 노래가 있다. 노래 속 "언덕 위의 바보"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바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조용히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의 평가에 흔들리지 않으며,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이해한다. 대표적인 구절은 "But the fool on the hill sees the sun going down, And the eyes in his head see the world spinning round.(언덕 위의 바보는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고, 그의 눈은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본다.)" 여기서 '바보'는 실제로는 깊은 통찰을 가진 사람을 상징한다.
위버멘쉬(초인), 군자, 진인, 수행자, 언덕 위의 바보(The Fool on the Hill)" 등 이름은 다르지만, 모두 자신의 내면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인간의 가능성을 비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친구중에 한 사람이 자신의 호를 자칭 와우(蝸㝢, 달팽이집)라고 한다. 달팽이는 하루에 몇 센티미터를 움직여도 자신의 걸어갈 방향을 결단하고 책임을 진다. 초인이나 군자와 다를 바 없다. 각자의 삶에서 결단하고 책임지는 삶이라는 점에서 크고 작음을 가늠할 수 없다.
각 글의 끝에 연주 영상을 함께 담은 이유도 여기에 있다. 글은 생각을 전하지만, 음악은 마음을 전한다. 글과 음악은 서로 다른 언어이지만 결국 하나의 삶을 이야기한다. 글을 읽은 뒤 음악을 듣는 시간은, 나의 회고가 여러 사람의 회상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작은 초대이기도 하다.
돌이켜 보면 인생은 특별한 사건보다 평범한 하루들이 쌓여 이루어진다. 그 평범한 하루를 의미 있게 바라볼 때 비로소 삶은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된다. 기억은 과거에 머물러 있지만, 회고는 미래를 향한다. 지나온 시간을 이해할수록 앞으로 걸어갈 길도 분명해진다.
이 글들이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유년기를 떠올리게 하고, 스승과 부모, 선배를 기억하게 하며, 음악과 예술을 통해 삶을 조금 더 아름답게 바라보는 계기가 된다면 다행이다.
글 뒤에 하모니카 연주를 남겼다. 말로 다 전하지 못한 마음을 음악이 대신 전해 줄 것이라 믿는다. 결국 우리의 삶은 말과 침묵, 그리고 음악이 함께 써 내려가는 하나의 회고기록이기 때문이다.
삶은 기억이 아니라 기록 속의 해석이다.

< 자료목록>
1부 유년기의 힘 The Influence of Childhood
1. 잠의 힘- 생명의 관성: 잠드는 것, 어쩌면 꿈꾸는 것
https://blog.naver.com/wtcho2/224309655090
2. 건너 마을 할머니의 기도, 정화수와 삼신 할미 Samsin, the Goddess of Birth: 보호의 힘
https://blog.naver.com/wtcho2/224309773493
3. 아버지의 노래 : 정서의 힘
https://blog.naver.com/wtcho2/224310159337
4. 내 마음 속에 피는 어머니의 상사화 : 존재의 힘
https://blog.naver.com/wtcho2/224311237490
5. 유년기에 들은 언어의 지도: 인식의 힘
https://blog.naver.com/wtcho2/224312661892
6. 똥통에 빠지다: 분별의 힘
https://blog.naver.com/wtcho2/224313300162
7. 아쉬움과 그리움: 미래는 오래된 사진첩 속에 상영되고 있네
https://blog.naver.com/wtcho2/224313934530
2부 두고두고 기억나는 사람 People Who Remain in My Memory
8. 대대장이 병사의 탄약을 들어줄 때
https://blog.naver.com/wtcho2/224314825286
9. 내 안에 남아있는 존경하는 선배 세 사람
https://blog.naver.com/wtcho2/224322525290
10. 60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두 분의 선생님
https://blog.naver.com/wtcho2/224322526998
3부 어떻게 지내시는지
11. 음악활동과 예술정원산책
https://blog.naver.com/wtcho2/224323669434
12. 왜 기록하는가
https://blog.naver.com/wtcho2/224329431633
13. 우리는 어떤 음악을 추구할 것인가
https://blog.naver.com/wtcho2/224329435648
14. 예술: 부족함과 열정사이의 균형
https://blog.naver.com/wtcho2/224329437498
15. 뒷담화하는 사람, 뒷담화를 전하는 사람, 전해듣고 화내는 사람
https://blog.naver.com/wtcho2/224326809006
16. 회고를 마치며 – 삶은 기억이 아니라 해석이다
https://blog.naver.com/wtcho2/224336876102
♬ 음악회고: 자신의 귀를 향하여 노래부르다.
김민기 선생을 기리며
힐링음악35🌿 Red Wing – 마음을 쉬게 하는 재즈 하모니카 한 순간🎵 | 조원탁
https://www.youtube.com/shorts/fBDw6KLhcYM?t=20&feature=share
♬ 힐링 컬렉션 ④ | 경쾌한 슬픔의 역설 – 하모니카로 건네는 위로의 리듬/ 조원탁
https://blog.naver.com/wtcho2/224079699475
힐링 컬렉션 ④ | 경쾌한 슬픔의 역설 – 하모니카로 건네는 위로의 리듬/ 조원탁
힐링 콜렉션 ④ | 경쾌한 슬픔의 역설 – 하모니카로 건네는 위로의 리듬/ 조원탁 슬픔은 때때로 따뜻한 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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